글쓴이 보관물: Toughman

상수리 묵

얼마 전 점심시간에 반찬으로 묵이 나왔다. 평소 때 라면 별 생각 없이 먹었지만 도토리와 상수리가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이 시기가 되면 오래 전 상수리 묵을 만들 던 기억이 난다.

오래 전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께서 어느날 상수리 묵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마침 시기가 늦가을이라서 산에 가서 상수리를 충분히 주워올 수 있었다. 만드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할머니께 말씀 드리니 빙긋이 웃으시면서 알려줄 테니 주워오라고 하셨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동네 상수리 나무를 모두 찾아가서 상수리를 주워왔다. 생각보다 많은 양을 주워올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주워가서 그런 모양이었다. 하루나 이틀을 더 돌아다녀서 더 많은 양을 주워 올 수 있었다.

상수리를 주워오니 할머니께서는 겉 껍질을 모두 벗겨내라고 하셨다. 껍질이 꼭 밤과 같아서 손으로 벗겨내기가 참 어려웠다. 내가 어렵게 껍질을 벗기고 있으니 할머니께서는 조금 쉬운 방법을 알려주셨다. 절구에 상수리를 넣고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찧은 다음 벗기면 수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대로 하니 훨씬 수월하게 두꺼운 껍질을 벗겨낼 수 있었다.

껍질을 모두 벗겨내니 함지박에 넣고 물을 부으라고 하셨다. 이유를 여쭈어 보니 상수리의 떫은 맛을 없애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루 정도 지나서 물을 다시 따라 버리고 다시 부으라고 하셨다. 계속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데 상수리 맛을 보아 떫은 맛이 사라질 때 까지 하면 된다고 하셨다. 떫은 맛을 없애는데 이틀이나 사흘 정도 걸릴 것으로 기억된다.

떫은 맛을 다 빼고 상수리를 맷돌에 갈라고 하셨다. 난 맷돌을 들어다 맞추고 모두 갈았다. 손자가 혼자서 하는 것이 안쓰러우셨는지 할머니께서는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맷돌을 같이 돌려주셨다. 어렸을 적 두부를 만드는 콩을 갈 때 맷돌을 같이 돌리며 도와드렸던 생각이 났다.

그 다음으로는 갈려진 상수리를 손으로 꼭 짜서 다른 함지박에 담으라고 하셨다. 갈려있던 상수리를 모두 짜서 물만 남겨진 함지박과 상수리 찌꺼기만 남은 함지박 두개가 남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상수리 찌꺼기가 들어있는 함지박에 물을 조금만 붓고 다시 짜는 과정을 반복하라고 하셨다. 짜여진 물은 원래 짜여져 있던 물이 있는 함지박에 부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고 나니 꼭 무슨 흙탕물처럼 되어 있었다. 이제 찌꺼기는 두엄에 버리고 함지박에 있는 물은 몇일 가라앉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가라앉히는 과정이 생각보다 길어서 나흘이상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일 기다려보니 위에는 맑은 물이 고였고 아래 부분에 엷은 갈색을 띈 침전물이 생겼다. 할머니 말씀대로 위에 맑은 물을 조심스럽게 따라내었다. 다 따라내지는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나중에 묵이 너무 되면 그때 다시 부어 약간 묽게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정도 따라내고 나니 함지박에 남아있는 것을 끓이면 묵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묵을 처음 만들어 보는 터라 물이 어떻게 묵이 되나 생각되었다.

휴대용 가스 버너를 마루에 가져 다 놓고 양은 냄비에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계속 저으면서 끓였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걸쭉하게 되어버렸다. 할머니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찬물에 앉히면 묵이 된다고 하셨다. 말씀대로 찬물에 앉히고 다음날 확인해 보니 상수리 묵이 되어 있었다. 칼로 잘라서 할머니께 드렸더니 맛있게 드셨었다. 나도 맛을 보았는데 가게에서 파는 묵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떨 결에 상수리 묵 만드는 법을 할머니로부터 전수 받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묵을 처음 만드는 것이었지만 정말 정성을 다해 묵을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할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음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맛있는 상수리 묵을 드시고 흡족해 하시는 모습을 보니 위안이 많이 되었다.

지금도 우연히 묵을 보면 그때 할머니가 보시는 가운데 묵을 만들던 기억이 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만큼은 정말 행복했었다. 앞으로 내가 묵을 직접 다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항상 그때 처음 만들던 그 느낌을 기억할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마음한편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정말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이다.

시멘트 블록 사이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식물

얼마 전 일과 시간에 잠깐 머리를 식히러 나와서 잠깐 산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느 대 도시의 좁은 골목길처럼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차된 차 사이로 노란 꽃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였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참외인지 오이인지 잘 모르겠지만 덩굴식물인데 아직 어린 상태였습니다. 앙증맞은 노란꽃이 여러 송이 피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0.5mm 너비의 시멘트 블록 사이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마 근처 가정집에서 음식물 쓰레기로 내놓은 것에서 씨앗이 그 사이로 들어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지만 살려고 하는 의지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그만 틈에서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식물을 보고 느낀 점이 참 많았습니다. 나 자신의 상황을 주변과 비교하며 스스로 환경과 조건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었지만 또 다른 욕심을 추구하기 보다는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메마른 시멘트 블록 사이에서 예쁜 꽃을 피운 그 모습은 내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